책소개
릴케가 피렌체 여행길에 사귄 하인리히 포겔러의 초청으로 보릅스베데를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1900년 8월 27일이었다. 독일의 항구도시 브레멘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는 참신하고 독특한 화풍으로 당시 세인의 주목을 끈 몇몇 화가들이 도시 문명에 등을 돌리고 자연에 심취해서 서로 격려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곳에 둥지를 튼 화가는 이곳 출신 처녀를 사랑하고 있던 프리츠 마켄젠이었는데, 그는 두 친구 한스 암 엔데와 오토 모더존을 설득해서 이곳에 데려왔고, 곧 브레멘 출신 프리츠 오버베크와 하인리히 포겔러가 여기에 합류했다. 뒤셀도르프와 뮌헨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들이 의기투합해서 보릅스베데에 합류하는 과정을 릴케는 이들이 추구하는 예술에 내재해 있던 필연적 운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릴케가 보릅스베데의 풍경화가들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당시 브레멘 미술관 관장으로 있던 구스타프 파울리의 호의적인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명의 화가들을 소개하는 그의 글은 이 화가들의 그림을 담은 122개의 화보와 함께 1903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그의 텍스트는 장르를 떠나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구도자의 시적 순례기처럼 읽어야 한다. 실제로 미술 작품에 대한 그의 관찰은 이제 막 습작기를 통과하며 자기만의 고유한 시적 어법을 찾아가고 있는 젊은 시인의 학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릅스베데≫를 쓸 무렵의 릴케가 풍경에 관심을 집중한 데에는 당시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 세기말은 산업화된 도시 문명이 인간의 정신적 기반을 황폐하게 만드는 질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화 비관주의적 의식이 만연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가들이 자연에 주목하게 된 것은 곧 도시 문명에 대한 염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본 자연은 낭만주의자들이 본 것과 같은 인간 친화적인 자연이 아니다. 릴케의 말대로 그것은 인간에게 무심한 자연, 그러기에 인간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하는 자연이다.
보릅스베데에 옹기종기 모여 예술가 마을을 이룬 풍경화가들에서 릴케는 진지한 자연 탐구의 모범적인 태도를 발견했다. 그들이 그린 풍경화에는 새롭게 발견된 자연이 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아예 추방되었거나,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분으로써 풍화작용에 적응한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은 인젤 출판사에서 원색 화보를 곁들여 출판한 ≪Rainer Maria Rilke, Worpswede, Frankfurt am Main≫(1987)을 원전으로 사용했다. 수많은 인명에 대한 해설은 최근의 인젤 출판사판 릴케 전집 4권 중 호르스트 날레브스키(Horst Nalewski)가 발행한 ≪Rainer Maria Rilke, Schriften≫(1996)의 주석을 참조했다.
200자평
보릅스베데의 다섯 풍경화가의 진지한 자연 탐구의 모범적인 태도를 소개한다. 릴케는 미술에서 ‘예술적 형상’의 모범을 찾았고, 또한 로댕과 세잔으로 대표되는 조형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을 자신의 ‘시적 형상’의 구현에 응용하려고 고심했다.
릴케의 시에서 발견되는 모티브들이 미술 작품의 관찰에서 어떻게 연유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물질문명의 질주 속에서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느끼며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서 인류 문명사를 반성하려고 했던 릴케의 글은 상업적 개발을 명분으로 점점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시금 일깨운다.
지은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폴 발레리, T.S. 엘리엇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르며 독보적인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1875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출생했으며, 육군고등학교에 입학해 군인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했다. 그 후에는 프라하, 뮌헨, 베를린 등의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의 시들은 감상적인 연애시들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그러한 경향은 1896년 루 살로메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바뀐다. 다른 작품으로는 『말테의 수기』 『삶과 노래』 『나의 축제를 위하여』 『두이노 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이 있으며 2천 편이 넘는 시, 단편 소설, 희곡, 예술론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썼다. 릴케는 ‘자기 본성의 풍부한 수확’을 1만 통이 넘는 편지에 담았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릴케는 통신 기술이 발달해서 빠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20세기에도 18~19세기에 만개했던 소통 수단인 편지로 수많은 사람들과 내면의 교류를 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삶과 예술, 고독, 사랑 등의 문제로 고뇌하던 젊은 청년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에게 보낸 10통의 편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외부의 평가를 기대하지 말고 자기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릴케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큰 감동을 준다.
옮긴이
안문영은 서강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본 대학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후기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부터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대 독일 시와 번역 이론, 그리고 릴케와 괴테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요소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괴테, 릴케, 첼란, 구체시, 문학 용어 번역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릴케의 편지』, 『보릅스베데의 풍경화가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동 시집』, 제니 에르펜베크의 『늙은 아이 이야기』, 로버트 슈나이더의 『오르가니스트』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머리말
서론
프리츠 마켄젠
오토 모더존
프리츠 오버베크
한스 암 엔데
하인리히 포겔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풍경화에 대한 역사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런 책을 기다려왔다. 풍경화의 역사를 쓰게 될 사람은 거창하고도 희귀한 과제, 전대미문의 새로움과 깊이로 혼란스러운 그런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초상화나 헌정화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야 할 길도 멀기는 하다. 내용이 잘 정돈된 휴대용 참고서 같은 근본적인 지식이 손 닿는 곳에 있어야 하고, 확실하여 흔들리지 않는 안목과 함께 예리한 시각적 기억력도 필요하다.